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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비론과 양시론을 넘어[160호][광장칼럼]
2011-04-06 11:31:55

양비론과 양시론을 넘어

<<< 기득권 세력은 무관심을 조장한다. 일부러 정치를 분탕질하며 ‘다 똑같은 놈들’이라는 인식을 만들어낸다. 이른바 양비론(兩非論)이다. 정치혐오증을 만들어내고, ‘참여해봤자 뭐해?’하는 허무주의를 유포한다. 기득권이 촉수를 내리고 서식하는 음습한 자양분이다. >>>

곽대중 <광장> 편집장

1.

마흔의 나이를 눈앞에 둔 어느 교민이 “지금껏 한 번도 투표를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하기에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중국에 온 이후로 여러 여건상 투표를 하지 못한 것은 그렇다치더라도, 한국에서도 일부러 투표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를 물으니 “그 놈이 그 놈 같아서……”라며 머리를 긁적인다.

물론 무관심과 불참(不參)도 의사표현의 방법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모든 방법은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고, 그것이 최종적으로 누구에게 득이 될지 진중히 고려해볼 일이다.

누구에게 득이 될까? 대체로 기득권을 가진 측에 도움이 된다. 기득권 세력은 이른바 ‘고정표’를 확보하고 있고, 무관심과 불참 속에 어영부영 권력을 재창출해내는 방법이 가장 쉽고 빠르기 때문이다. 그 무슨 영광을 얻겠다고 더 많은 대중이 참여하여 압도적인 지지 속에 권력을 창출해내는 것을, 기득권 세력은 바라지 않는다. 그들에게 권력은 수립되는 과정이나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권력 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침묵은 곧 독재에 야합하는 것’이라던 1970~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의 절규가 그리 과장된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기득권 세력은 무관심을 조장한다. 일부러 정치를 분탕질하며 ‘다 똑같은 놈들’이라는 인식을 만들어낸다. 이른바 양비론(兩非論)이다. 정치혐오증을 만들어내고, ‘참여해봤자 뭐해?’하는 허무주의를 유포한다. 기득권이 촉수를 내리고 서식하는 음습한 자양분이다.

이러한 양비론은 우리의 일상에도 만연해있다. 어떤 일엔가 시시비비를 가리고자 따지는 사람이 있다면 “시끄럽게 뭘……”하면서 구시렁거리고, 그렇게 앞장서는 사람을 ‘참 별난 사람’이라고 인상을 찌푸리거나 무언가 개인적 속셈이 있을 거라 치부해버린다. 이것이 누구에게 좋을까? 역시 기득권 세력에게 좋다.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고 뭇 사람들의 등을 토닥거리며, “자, 자, 원안(原案)대로 합시다”라고 넉살좋게 웃는다. 기득권자가 화평(和平)주의자의 탈을 쓰는 기가 막힌 순간이다.

세상에 ‘그놈이 그놈’이란 없다. ‘그놈’ 가운데 ‘조금 나은 그놈’이 있을 수 있고, 그렇게 ‘조금 나은 그놈’을 통해 희미하게나마 개선의 발판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우리네 선택이다. 혁명(革命)을 하지 않는 한 그렇게 나아가는 것이 우리 삶의 한 방식인 것이다.

2.

양비론과 함께 경계해야 할 것이 양시론(兩是論)이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입장이다. 양시론에 서있는 사람들은 ‘이해’와 ‘인정(認定)’을 구분 못한다. 특히 어떤 조직의 지도층에 몸담고 있는 사람은 늘 이러한 양시론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한다고 하는 것과 인정한다고 하는 것은 엄격히 다르다. 이해한다는 것은 입장과 처지에 어느 정도 공감한다는 말이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누구에게든 어떤 일이든 사건 발생의 이유가 있고, 그럴법한 개연성이 존재한다. 무릇 지도자는 편견과 선입견에 치우지지 않고 그런 모든 입장과 처지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다양한 논리와 주장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그렇더라도 결정의 순간은 분명해야 한다. 수많은 목소리 가운데 더욱 힘을 실어주어야 할 목소리가 당연히 존재한다. 그것에 탕탕탕 의사봉을 두드려주는 행위가 바로 ‘인정(認定)의 결단’이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아, 네 말도 옳고 저 말도 옳아, 라는 무골호인(無骨好人)의 태도는 성직자나 자선사업가에게는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치열한 현실세계의 조직을 이끌어 가는 사람에게는 적절치 않은 태도이다. 우리가 흔히 ‘처신이 분명치 않다’고 비판할 때에는 대개 이러한 지도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지도자는 고독하다. A의 의견은 30%가 옳고 70%가 틀렸으며, B의 의견은 70%가 옳고 30%가 틀렸다. A과 B의 의견을 적절히 배합하여 양쪽의 손을 모두 들어주었으면 좋으련만, 결정에는 흔히 배제(排除)의 고통이 따른다. 어쩔 도리 없이 한 측의 손을 들어줘야 하는 경우다. 이러한 고뇌와 번민의 순간은 정치적 지도자뿐만 아니라 사업체를 이끌어가는 경영인의 경우에도 비근하게 나타난다. 때로는 하루에도 수도 없이 가슴쓰린 결정의 순간에 직면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지도자의 숙명이다. 그것이 싫다면, 지도자의 길을 버리고 차라리 득도(得道)의 수행자를 자처하는 것이 어떨까.

난세(亂世)에는 백성이 백성 노릇하기 힘들고 임금이 임금 노릇하기 힘들다고 한다. 백성이 백성 노릇을 제대로 하려면 대체로 양비론을 버려야 한다. 분명한 자기 주견을 갖고 차악(次惡)의 선택이라도 해주어야 도리다. 임금이 임금 노릇을 제대로 하려면 양시론을 버려야 한다. 더러는 한 측의 격렬한 항의에 직면할 지라도 대의를 위해 명확한 결정을 내려주어야 백성들이 편안하다. 화합(和合)은 그러한 선택과 결정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움직일 때에 비로소 싹이 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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