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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록위마[指鹿爲馬]
2015-01-07 10:17:39

지록위마[指鹿爲馬]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는 뜻으로, 윗사람을 농락하여 권세를 휘두르는 경우를 말한다.

진(秦)나라 시황제를 섬기던 환관에 조고(趙高)란 악당이 있었다. 조고는 시황제가 죽자 유조(遺詔)를 위조하여 태자 부소(扶蘇)를 죽이고 어린 데다가 어리석은 호해(胡亥)를 내세워 황제로 옹립했다. 그래야만 자기가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호해를 온갖 환락 속에 빠뜨려 정신을 못 차리게 한 다음 교묘한 술책으로 승상 이사(李斯)를 비롯한 원로 중신들을 처치하고 자기가 승상이 되어 조정을 완전히 한 손에 틀어쥐었다.

 

‘이제 내 세상이다.’

 

조고는 입을 다물고 있는 중신들 가운데 자기를 좋지 않게 생각하는 자를 가리기 위해 술책을 썼다. 어느 날 사슴 한 마리를 어전에 끌어다 놓고 호해한테 말했다.

 

“폐하, 저것은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폐하를 위해 구했습니다.”

“승상은 농담도 심하시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니[指鹿爲馬(지록위마)]’ 무슨 소리요?”

“아닙니다. 말이 틀림없습니다.”

 

조고가 짐짓 우기자, 호해는 중신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아니, 제공들 보기에는 저게 뭐 같소? 말이오, 아니면 사슴이오?”

 

그러자 대부분 조고가 두려워 ‘말입니다.’ 라고 대답했지만, 그나마 의지가 남아 있는 사람은 ‘사슴입니다.’ 라고 바로 대답했다. 조고는 사슴이라고 대답한 사람을 똑똑히 기억해 두었다가 죄를 씌워 죽여 버렸다. 그러고 나니 누구도 감히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자가 없게 되었다. 나중에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유방의 군대가 서울인 함양(咸陽)으로 밀고 올라오는 가운데 조고는 호해를 죽이고 부소의 아들 자영(子嬰)을 3세 황제로 옹립했으나, 똑똑한 자영은 등극하자마자 조고를 주살해버렸다.

 

한 해의 마지막 달력을 넘길 즈음이면 각 분야에서 1년을 평가하는 일로 마무리 삼는다. 영화계에서는 그 해의 영화를 선정하고, 언론에서는 올해의 사건 등을 꼽으며 한 해를 갈무리하는데 나름 의미 있는 일이다. 교수들도 '올해의 사자성어'를 꼽는 것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데, 올해는 지록위마(指鹿爲馬)를 꼽았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 의미야 잘 알려져 있고 관련 기사가 넘치니 생략하고, 딴지를 걸자면 이 성어가 과연 올해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말일까 하는 것이다.

 

2014년의 한국을 돌아본다면, 사자성어를 들먹일 것도 없이 '갑'의 '을'에 대한 횡포가 극에 달한 한해다. 갑은 가차 없이 정부조직을 해체하고, 소수지만 국민의 표를 얻어 원내에 진출한 정당도 해체한다. 이륙하기 위해 활주로를 달리던 비행기를 돌리기까지 한다. 심지어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숱한 사건·사고들의 중심을 들추면 여지없이 갑이 자리 잡고 있다.

 

갑은 특정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국가 수반을 정점으로 하여 조직과 기관은 물론 심지어는 단둘이 맺은 관계에도 여지없이 발생한다. 사업장은 물론, 편의점, 아파트 단지에서도 갑의 횡포는 갖가지 행태로 자행되고 있다. 대학도 빠지지 않고 장래를 볼모로 제자를 추행하는 갑질 횡포를 다채롭게 했다. 바야흐로 갑을관계는 우리 사회의 모든 곳에서 기본 시스템으로 깊이 뿌리내렸다. 그 시스템에서 끓어오르는 갑의 횡포와 을의 굴욕은 임계점에 이르러, 온 나라 안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고 있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일은 정치권과 언론은 이른바 갑질의 횡포가 여기저기 터질 때마다 호들갑스럽게 다루지만, 정작 이를 해결할 방도를 심층적으로 다루는 일은 게을리한다는 점이다. 국회와 행정기관에서는 기껏해야 다 찢긴 창호에 바람 숭숭 들어오는 곳만 땜질하듯 사후약방문격으로 쥐꼬리만큼의 대책을 내놓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자성어 뽑기는 그것이 합당한 지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병든 사회를 치유하는 일을 등한시하고 현실에 성어를 대입하는 유희로 보인다는 점에서 썩 반갑지 않다.

 

대한민국의 갑이 권력과 결탁한 자본을 중심으로 자라났다면 조선시대의 갑은 사대부다. 신분제의 모순이 깊어가는 조선 후기의 사대부들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현실에 안주하고 기존 질서를 부여잡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처량한 현실에서도 문제를 직시하는 인물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중 한 인물이 박제가다. 북학파의 일원인 그는 낡고 가난한 조선을 개혁하기 위해 내놓은 방도가 대부분 중국을 모델로 삼은 이른바 북학론을 근간한다. 하지만 그 가운데 독창적인 생각으로 번득이는 것이 '유생을 도태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과거시험장에 나오는 유생이 10만이 넘는다. 이들은 농업에 종사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의 부자 형제들까지도 농업에 종사하지 않고 농민들을 부리기만 하고 있어 농사를 망치는 가장 심각한 요소다. 그러니 도태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박제가는 '북학의'를 지어 임금에게 바치며 감히 이렇게 아뢰었다. 특히 다음 대목을 주목한다. "똑같은 백성이지만 부림을 받는 자와 부리는 자 사이에는 강자와 약자의 형세가 형성됩니다. 강자와 약자의 형세가 형성되고 나면 농업은 날로 경시되고 과거는 날로 중시되게 마련입니다." 그는 나라에 망조를 들게 하는 조선판 '갑을관계'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그 관계를 없애기 위해 갑을 약화하는 것이 긴요한 일임을 설파했다.

비록 살아생전 실현되지 못한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외쳐야 하는 것이 식자들의 책무다. 오늘 우리 학계는 과연 온 사회를 도배한 갑을관계를 해결하기 위해 어떠한 방책을 공론화시켰나. 분야별로 논의를 붙여 해결책을 찾는 방향으로 추동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거늘, 수천 가지나 되는 사자성어 가운데 올해에 가장 가까운 것을 찾는 일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한해를 관망하다가 마지막에 총평하는 것으로 일말의 권위를 확보하려는 모습이 부질없다. 그렇게 해마다 꼽은 사자성어가 나라가 좋아지는데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악화일로로 치달아 지금에 이른 현실이 잘 보여준다. 나 또한 부끄럽기는 마찬가지지만, 이제부터라도 박제가의 용기를 되새겨야 할 일이다. 지금은 한가하게 사자성어를 읊을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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