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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으로 연주한 효의 악장 [113호][교포수필]
2007-03-16 16:36:02

생명으로 연주한 효의 악장 

 

 ‘증자가 돼지를 잡다’는 고사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 고사는 비록 아무리 철부지와 한 말일지라도 일단 언약을 했으면 에누리없이 이행(履行)해야 한다는 도리를 시사해주고 있다. 증자의 행위는 수 천년을 내려오면서 ‘언약 이행’의 모범으로 회자되어왔다.
언약이란 흰 종이에 검은 글자를 남겨서만 언약인 것이 아니다. 무릇 ‘어찌어찌한다’고 했으면 그것이 곧 언약인 것이다. 물을 쏟고 줍지 못하듯 입밖에 나간 말은 시위 떠난 화살이요, 흘러가버린 물이다. 성별, 나이, 직위, 환경에 관계없이 일단 맺은 언약은 이행하는 것이 상례이다. 값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장사꾼처럼 변덕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 언약은 이행을 전제로 한 계약이다. 언약을 이행하는가 하지 않는가는 신용이 있는가 없는가를 판가름하는 시금석이다. 인격자인가 위선자인가를 보여주는 명함장이다. 사람 됨됨이 진실하고 믿음직한가 아니면 그렇지 못한가를 스스로 고백하는 자백서이다. 그러하기에 자신없는 말은 아예 입도 뻥긋하지 말아야 하고 일단 언약을 했으면 그 언약에 충실해야 한다.
지난 2월 초순 인민일보, 신화사, CCTV, 인민 웹사이트 등 매체의 집중보도를 통해 무명소졸로부터 일약 중화의 대명인으로 부상한 사연신. 지난해 그는 “하남성 10명 경로모범 특별상”, “중국을 감동시킨 10명 광부”, “중원 24효현” 등의 영예를 지녔다. 초작그룹 선전부장의 소개에 의하면 사연신의 사적을 원본으로 한 장편소설이 이미 탈고되어 출판에 교부되었을 뿐 아니라 텔레비전 연속극과 예극도 창작중에 있단다. 하남성의 일부 가사관리회사에서 사연신을 방문하고 전속모델이 되어줄 것을 희망하였으나 그는 단연히 거절하였다.
22살 나던 1973년에 사연신은 같은 마을 처녀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듬해 딸을 낳은지 40일만에 아내는 산후풍으로 이 세상과 결별하고 말았다. 임종전 아내는 친정집 양친 부모님과 남동생을  돌봐달라고 부탁하였고 그는 꼭 그렇게 하겠다고 언약하였다. 장례를 치른 후 과연 그는 아내와의 언약대로 처갓집 식솔을 집에 모셨다.
1979년 장인이 중풍에 걸려 1996년 사망할 때까지 옹근 18년동안 침대에 누워있었으나 욕창 한번 나지 않았다. 장인의 대변이 늘 굳어 사연신은 손으로 파냈고 간경화로 부어오른 다리를 매일 더운 물로 찜질해드렸으며 수시로 안마해드렸다. 장인의 사지가 굳어 때론 안마할 때 아프다고 욕을 해도 웃는 얼굴로 대했고 장인을 업고 나가 볕쪼임을 시켰다. 장인이 예극을 좋아하니 탄광에 출근하여 받은 첫 월급으로 라디오를 사서 선물하였고 무협소설을 좋아하는 장인을 위해 늘 책을 빌려다가 틈만 나면 읽어드렸는데 18년간 100여부의 소설을 읽어드렸다.
폐기종, 위궤양, 관절염 등 질병으로 일찍 노동능력을 상실한 장모는 특별히 추위를 탔고 찬물에 전혀 손을 대지 못해 춘하추동 온갖 빨래를 사연신이 해왔다. 장모님이 추워한다고 700여 위안이란 큰 돈을 들여 장모님 방에만 스팀을 설치하였다. 한때 탄광에서는 갱에 내려가 채탄하는 사람들에게 점심 보조로 구운 떡 두 개와 달걀 두 개를 주었는데 달걀을 남겼다가 장모님께 드렸다. 사연신보다 3살 아래인 처남은 선천적인 백치로 늘 혼자 밖을 나도는데 끼니때도 집에 오지 않아 식사 때 마다 밖에 나가 처남을 찾아오곤 하였고 깨끗이 빤 옷을 자주 갈아 입히고 늘 손톱을 깎아주었다.
딸 류섭영이 6살 때 할머니네 집에 보내졌는데 생활이 힘들어 소학교 4학년 때 중퇴하고 농사일을 도왔다. 18살 때, 동네 아이들이 던진 돌팔매에 눈을 다쳤으나 제때에 치료하지 못해 오른쪽눈이 영영 시력을 잃고 말았다. 1994년 딸이 출가할 때 뜨개질하는 방법을 소개한 책을 결혼선물로 주었다. 출가하기 전까지 아버지와 함께 있은 시간이 7년도 안되어 딸은 습관적으로 친아버지를 삼촌이라고 불러왔다.
탄광에 출근하기 전 사연신은 벽돌공장, 건축현장, 화물운송 등 곳에 가서 날품을 팔았다. 채소가 한 근에 10전이었으나 쓰레기더미를 밭으로 만들어 채소를 심어 먹었고 여러가지 짠지를 만들어 사계절 먹었다. 4원짜리 끌신을 6년이나 신었고 셔츠 한 벌을 10여 년 입었다. 식초에 담근 땅콩이 고혈압에 좋다는 말을 듣고 1990년부터 2003년 뇌출혈로 입원할 때까지 옹근 14년간 그것만 먹었다. 지나친 과로로 2003년 뇌출혈로 쓰러져 세 번이나 입원하였다. 지금 그 후유증으로 반응이 더디고 행동이 굼뜨며 기억력이 쇠퇴해졌다. 하지만 한번도 우는 소리를 하지 않았고 회사에 손을 내밀지 않았다. 몇번이나 동료들이 그를 대신해 구제금을 신청하고 회사에서도 동의하였으나 더 곤란한 사람이 많다고 하면서 단호히 구제금을 거절하였다. 그는 줄곧 노임을 봉투채로 장모님께 맡기고 가정의 모든 경제를 장모님이 관리하게 하였다.
아내가 작고한 후 부모형제와 이웃들에서 수차 혼처를 물색했으나 그의 가정형편을 듣고는 모두 뒷걸음질쳤다. 재취를 권고하는 장인과 장모님을 안심시키기 위해 부모형제들에게 사연을 밝히고 장인의 성씨를 따라 아예 류씨를 사씨로 고쳐버렸다. 23살 젊은 나이에 홀아비가 되어 만 10년이 지나 1984년 9월에 비로소 아내를 맞았다. 결혼 이듬해에 딸을 보았으나 늘 갈라져있어 이 딸 역시 맏딸처럼 친아버지를 삼촌이라고 부르는데 습관되었다.
사연신의 사적을 취재하던 한 기자는 거의 절망적으로 ‘이건 그야말로 정상적인 사람의 소행이 아니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이렇게 해왔는가’라고 부르짖었다. 그렇다. 10년, 20년을 함께 한 것도 아니고 겨우 1년 살고 저 세상으로 가버린 아내와 한 언약, 산 사람도 아닌 죽은 사람과의 언약을 그는 30여 년이나 어김없이 지켜왔고 초인간적인 의력과 다함없는 사랑으로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는 처가집을 위해 청춘과 한생을 고스란히 바쳤고 혼신의 힘을 다 하였다. ‘긴 병에 효자가 없다’고 하지만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어도 변함없는 일편단심, 무엇이 그로 하여금 34년을 하루와 같이 효성을 다하게 하였을까?
“인간의 양심이 나로 하여금 그들을 포기할 수 없게 했다.” “사람은 양심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어려워도 일단 맺은 언약만은 저버릴 수 없고 최선을 다 해야 한다.” 기자의 물음에 대답한 사연신의 너무나도 수수하고 소박한 말이다. 양심은 그의 삶의 신념이었고 행위준칙이었다. 사람의 인격은 언약에 대한 이행과 정비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무리 명인이고 고관대작이라 해도 언약을 휴지조각으로 여긴다면 인격은 곧 평가절하되고 신용이 없는 사람이란 딱지가 붙을 것이다.
사연신은 당원도 아니고 노동모범도 아니며 영웅도 개혁가도 학자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마다 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도리를 당연히 알고 있으면서도 하기 꺼려 하고 하지 않은 일을 하였다. 단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생명으로 비장한 효의 악장을 연주하였다. 이 거인의 형상에서 사람들은 찬연히 빛뿌리는 중화민족의 선량한 미덕을 온 심장으로 감지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스스로 낙제점수를 매기면서 급기야 왜소해지고 초라해진 자신을 발견하고 더없는 공허와 허무를 절감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거대한 산악마냥 다가설 수 없는 이 위대한 인격체에 숙연히 머리를 숙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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