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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중국 땅을 밟고 (6) [114호][옛날이야기]
2007-04-18 15:34:15

쟈무스(佳木斯)시의 북쪽으로 송화강이 흐르고 있다. 할빈쪽에서 흘러와 동쪽으로 흘러 가 동강(同江)시에 이르면 흑룡강과 합친다. 두 강이 합해지는 삼각지에는 습지가 형성되어 있어 소위끝이 보이지 않는 황무지로서 풀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이풀은 그 당시 일본의 관동군 말먹이로 이용되었고 나는 중학교 때 근로봉사라는 명목으로 말 먹이풀을 베러 갔었다. 들판 한가운데 잠자리로 임시숙소를 만들었고 옥수수빵 워토우(窩頭)를 한 끼에 두 개 씩 먹으며 풀을 벴다. 풀을베는 낫은 한국낫 같은 것이 아니고 낫자루가 1m나 되는 긴 것이고 낫날은 50~60cm나되는것으로 낫자루를 겨드랑에 끼고 우로부터 좌로 풀 밑쪽을 치고 나가면 풀이 오른쪽으로 가지런히눕는다. 그리고 돌아오면서 같은 방법으로 풀을 치면서오면 반대쪽으로 눕는다. 이것은 하루만 지나면 파랗게 말랐고 다음날 오전에 걷어서 묶어 피라미드같이 세워서 쌓았다. 그러면 나중에그네들이 실어간다고 했다. 저녁이면 모기가 어찌나 많던지 앞을 가려 걸어갈 수가 없을 정도였고 밤에는늑대 울음소리를 들으며 보름 동안이나 고생하던 그때가 그래도 그립다.

이 넓은 삼각지를 한국의 유명한 모씨가 중국정부와 계약을 하고 개간하여 콩을 심었다는 보도를 몇 년 전에본 일이 있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한테는 무척이나추억이 담긴 곳이기에 아직도 기억을 하고 있다.

기차로 쟈무스에서 할빈을 갈려면 남쪽의 목단강을 거쳐 가는 기찻길이 있고, 북쪽으로는 티에리(鐵力)시와 수이화(绥化)시를 거쳐서 가는 기찻길이 있다. 나는 북쪽의 기찻길을 택하여 가기로 했다. 왜냐 하면 티에리(鐵力)에는 당고모가 살고 계셨으며 몇 년 전 당고모님이 한국에 오셨을 때 만나 뵈었으나 이번에는 당고모님 집으로 찾아가서 뵙기로 한 것이다.

113호에서 언급했듯이 내가 9살 되던 해 봄 충청도에서 온 식구가 신천지인 만주로 이주해 갔었다. 나의 집안은 할아버지 3형제와 할아버지 4촌까지 네 분의 할아버지가 계셨으며 그 밑으로 아들딸, 사위등 4~50호의 대 가족이 할빈 아래에 있는 아성(阿城)현의 평산(平山)이라는 곳에 정착하여 같이한 동네에 살다가 해방과 더불어 거의 다 한국으로 귀국을 하였으나 그중 시집간 두고모만 시집식구 따라 중국에 남았다.

즉 둘째 할아버지께서 4남 3녀를 두셨는데 그중 둘째딸이 시집식구와 같이 중국에 남아 아들만 7형제를 두어 조선족으로 살고 계시고 넷째 할아버지의 딸 한분인 고모님도 시집식구 따라 중국에 남아 연길에서 4남1녀를 두어 조선족으로 행복하게 살고 계신다.

두 고모님 다 내가 중국에 오기 전에 고모부들은 돌아가셨으며 본인들은 오늘 현재 80이 훨씬 넘으시도록 살고 계신다. 그 중 둘째 할아버지의 둘째딸인 당고모는 나보다 8살 위인데 소학교 4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이 당고모님은 내가 5학년 때 18살에 시집을 가셨다. 우리 집에서 선을 봤는데 신랑이 까만 중국옷 마구아
(马褂)를 입고 있었으며 이 고모부는 독립운동을 하고 계셨기에 해방이 된 후 요직에 있다가 문화혁명 때 지방인 티에리(鐵力)시에 소위 즈칭
(知靑)이라는 명목으로 하방(下放)되었으며 고모부의 독립운동을 증명할 사람들이 다 돌아가시고 안 계셔서 빛을 못 보시고 그 후 쭉 이곳에서 즈칭판청(知靑返城) 칠 못하여 지금까지 농사를 짓고 살고 계셨다 한다. 아들 7형제 모두가 농촌에서 살다보니 출세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넷째 할아버지 딸인 고모님의 가족 역시 문화혁명때 모두 시골로 하방(下放) 되였으나 등소평이 나타나면서 그 아들딸들은 즈칭판청(知靑返城) 되어 돌아와 연길에서 모두 성공하여 잘 살고 있다. 이렇게 앞날의 운명이라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것임을 실감하게 하였다.
쟈무스(佳木斯)역에 갔더니 역시 좌석표가 없단다. 전에 태원(太原)을 갔다 올 때의 경험을 살려 무조건 기차를 탔다. 어찌나 사람이 많던지 침대칸으로 가는데 사람 틈을 헤치고 가느라 무척 힘이 들었다. 침대칸 차장을 만나 침대칸 하나를 부탁 하였더니 역시 차장이 침대칸 하나 비워주어 편안히 갈수가 있었다. 다음날 오전 10시쯤 티에리(鐵力) 역에 도착 하였다. 미리 알아둔 전화로 연락하여 역전에 살고 있는 林業局근무하는 넷째 아들네 집으로 갔다. 넷째는 출근하고 없었으며 그의 안식구가 어찌나 깔끔하던지 집 안팎이 반질반질 하도록 깨끗이 하고 울안에는 채소도 심고 아주 알뜰하게 살고 있었다. 이른 점심을 얻어먹고 고중에 다니고 있는 그의 아들과 같이 당고모가 살고 계시는 집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 5월 중순인데 눈이 녹아 길이 엉망이라 시외곽에서 농촌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차바퀴가 빠져 도저히 가지 못하였다. 걸어서는 상당한 거리라 하여 첫동네에 들어가서 동네 사람에게 부탁하여 경운기를 얻어 타기로 하였으나 경운기 주인이한 두 시간이 지나야 온다기에 마침 동네의 잔치 집에 들려서 술과 떡을 얻어먹으며 기다렸다. 이 잔치집의 신랑은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와 온 동네가 초가집인데도 이집만 기와집으로 새로 지었다. 그래서 그런지 모든 사람들이 한국이라는 나라를 동경하고 있었으며 내가 한국인이니까 모두 몰려와서 나와 함께 술을 마시며 여러 가지 대회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는데 나는 이곳에서 우리나라의 옛날 그대로의 농촌의 인정 많고 순박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드디어 경운기주인이 와서 아쉬운 작별을 하고 경운기를 타고 출발을 하였다. 질퍽한 진흙길인 농로길은 빨리 달릴 수가 없어느릿느릿 달렸다. 들녘에는 아직도 음지에 눈이 남아 있었으며 농한기라 그런지 사람의 그림자를 볼 수가 없었다. 동네를 지나면 들판이고 또 동네를 지나면 들판이었다. 우리 민족이 이곳까지 들어와 논을 개간 하였다니 참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리가얼마인지 모르겠으나 거의 한 시간을 달려드디어 고모님 집이 보이기 시작 하니 고모님이 뛰어나오시며 나를 반겼다.

고모님이 살고 계시는 이곳은 티에리(鐵力) 역에서 북쪽으로 상당히 들어간 곳이었는데 동네북쪽으로 멀리 그래도 산이 보였다. 그러나 남쪽으로는 한없이 뻗어 있는 지평선 너머로 멀리 부락이 보일락말락 보일뿐인 정말 아무것도 없는 들판의 논 한가운데에 몇 가구가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그래도 집 뒤에는 습지에 자그마한 연못이 있었고 여기에는 고기가 많아서 심심하면고기를 잡아 먹는다며 가을에 잡아서 말린 미꾸라지를 싸주셨는데 집에 가지고 와서 기름에 튀겨서 먹었더니 아주 맛이 있었다.

고모님은 셋째 아들과 같이 살고 계셨으며 그간 보고 싶었던 고모부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고 고모의 시동생도 작년에 작고 하셨단다. 나와 동갑내기인 고모의 시동생은 해방 후 내가 17살에 의용군으로 차출되어 아성(阿城)에서 총대를 메고 근무할 때 내가데리고 있었으나내가 떠나올 때 무정하게도 아무 말도 못해주고 떼어놓고 왔기에 항상 미안하여만나면 그때 이야기를 나누며 사과하고 싶었는데......

내가 왔다 하니까 근처에 살고 있는 둘째, 넷째네 식구들이 모두 찾아 왔다. 그리하여 대식구가 모여 함께 나를 위하여 정성들여 장만한 음식과 백주를 마시며 아주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당고모부는 해방 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셨지만 일곱이나 되는 자식들이 모두 농촌에서고생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무척 안쓰러웠다. 그 후 이들 형제들을 한국에 초청하였고 지금도한국에 몇 명이 남아 있다. 이틀 밤을 이곳에서 묵은 뒤 아쉬운 이별을 하고 다시 티에리(鐵力) 역에 도착 하였다. 이번에는 기차가 아니라 버스를 이용하여 할빈까지 가기로 하여 시외버스 정거장으로 갔더니 마침 할빈까지 가는 것이 없고 수이화(绥化)시까지 가는 버스가 있기에 이 버스를 탔다. 수이화(绥化)시에서 다시 할빈까지 가는 버스를 갈아 탈 예정이었다. 수이화(绥化)시는 생각보다 깨끗했으며 거리도 넓고 잘 정돈 되어 있었다. 버스터미널 옆에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때우고 할빈 가는 버스를 탔다. 그 무렵 천진의 버스는 냉난방 창치가 없었다. 그런데 이곳은 겨울이 워낙 추운 곳이라 그런지 난방 창치가 있었다. 이 난방창치는 라디에이터의 열을 굵은 철관을 통하여 의자 밑으로 운전수 뒤를 돌아 반대편으로 ‘ㄷ’자로 돌아가게 만들었으며 나는 맨앞좌석에앉았었기에 그 철관위에 발을 올려놓았다가 너무 뜨거워서 큰일날뻔 하였다. 위험은 했지만 버스 안이 그런 대로 따뜻하여 窮之通이라는 말이 떠올라 혼자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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