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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 대한 추억 -5 [121호][옛날이야기]
2007-11-19 09:20:54

아버지에 대한 추억 -5

1945년에 들어서도 일본은 매일같이 라디오에서는 적군의 비행기 몇 대와 전함 몇 개를 침몰시켰다는 방송은 하고 있었으나 태평양의 싸이판섬에서 일본군과 군속 등 전원이 옥쇄(玉碎)하였다는 소문과 점점 오끼나와까지 밀려 와서 전투 중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또 구라파에서 일본과 동맹을 맺은 독일과 이태리가 항복하였고 1945년8월6일 미군이 일본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다. 이로 인해 사망7,800명, 행방불명10,000명, 부상자37,000 명이었다 한다. 일본은 이제 기진맥진하여 항복을 하기로 결정하고 그 날짜를 조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다 하고 소련은 일본과의 불가침조약을 깨고 8월7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흑룡강을 물밀 듯이 건너 왔다. 그리고 일주일만인 8월15일에 일본은 결국 항복하게 된다. 만주에는 유명한 관동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나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믿고 주 부대를 남태평양 전투에 거의 다 차출되어가고 빈 껍데기만 남아있었다. 소련군은 단 일주일 만에 만주와 한국의 38선 북쪽을 점령하였으니 소위 소련은 손 안대고 코 푼 셈이다.  그리고 이 일주일로 인하여 한국은 남북으로 갈라지고 드디어 6.25라는 동족상잔의 씻을 수 없는 참담한 비극까지 치르게 된다.               

그때의 상황을 적은 아버지의 회고록을 아래에 옮긴다.

1945년 이른 여름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과 이태리가 전세가 불리하다는 소문이었다. 직감있는 인사는 왜()도 머지않아 패망(敗亡)할 것을 예측을 할 수가 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철수귀국(撤收還國)함이 상책인줄은 알고 있었으나 미련한게 사람이라 혹시 어떨까 하는 마음과 실제사정이 그리 간단치가 않았다.

즉 노령이신 부모님과 쇠약할 대로 쇠약한 유아 딸린 병처(病妻)가 문제이고 내 한 가족만이 아니고 3촌 두 분에 4촌이 다섯 집인데 작은아버지는「나는 절대 안 나가겠다」하시니 나만 살겠다고 차마 뜰 수가 없었으며, 당숙모에 6촌이 두 집 그리고 병문(炳文) 형제 세 가정, 정필(正弼)형제 세 가정, 여동생 화춘(和春)이, 또 출가한 여동생 종매(從妹)와 6촌 누이 길순(吉淳)이 4 형제, 친척, 가까운 친구 등 나와 직결된 관련자만도 20여 가구에 100여명이 넘는 대식구가 나 하나를 의지하고 사는 터에 수습이 쉽지 않았으며 그리고 벌려놓은 사업과 살림들이 너무 많아서 처리와 정리가 용이치 않았다. 

대석하학교의 교장으로 초임해간 김남규(金南奎)군이 6월에 갑자기 찾아와서 철수 귀국 할 것을 제의하였다. 선경지명이 있음을 칭찬하고 나는 전후 사정이 복잡해서 아직 결심할 수가 없으니 군은 속히 주선하여 귀한 하도록 하라고 독려해 보냈으니 해방 직전에 그는 무사히 한국으로 잘 떠났다.

8월6일 미군이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하고 8월7일 소련이 흑룡강을 넘어 쳐들어오니 기고만장 하였던 일인들은 풀이 죽어서 쩔쩔매고 있었다. 그리고 16일에 일제가 항복한 것을 알게 되였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가 일제 36년의 쇠사슬에서 풀려 해방이 되었다는 기쁨으로 우리는 서로 방문하며 감격을 나누었다.

왜인들은 약삭빠르게 뿔뿔이 사라졌으며 三門團子<일인개척단>개척단은 살림살이를 고스란히 버리고 지극히 초라한 모습으로 주인 찾는 애견들이 이리 닫고 저리 닫고 하는 것을 플랫폼에 남겨둔 채 기차에 오르니 그 비참한 정경이란 형언키 어려웠다. 팔리천(八里川)개척단은 단원 전원이 모여 앉아 단장이 던진 수류탄으로 집단자살로 처참한 최후를 거두었다. 술병을 들고 나를 찾아와 안주 없는 술로 바둑을 두어가며 마시던 森日<일인> 의사는 심약한 탓이었는지 자살대열에 아니 들고 지하 토굴에 숨어 있다가 이웃 주민에게 발각되어 피살되었다. 부현장이던 安陽五郞<일인>과 그 부하인 “사까이”는 극성을 부리며 가증을 피우더니 민중 앞에 끌려 나와 총살을 당하였다.

8월 하순이 되니 노병(露兵)이 진주하여 주둔하게 되는데 이자들의 기고만장이란 가관이었다.  며칠간은 별일 없더니 웬걸 차차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행인들의 시계와 만년필은 보는 대로 따와이(달라는 노어)하며 빼앗아서 한 팔목에 두 개 세 개씩 감고 다니며 행패를 부리는 것은 약과요 부녀자들을 닥치는 대로 농락하고 괴롭히는데는 놀랍고 난감하였다. 

풍문에 들으니 각 지방에서 자치기관을 조직 한다는 것이다. 일본인은 물러가고 만인은 방관하고 노병은 날뛰고 도적은 점성(漸盛)하고 민심은 불안 속에 들떠 헤매니 큰 일중에도 큰일이었다. 몇몇 유지와 협의하고 우리도 이곳 평산(平山)에 자치기관을 설치키로 추진하여 9월6일에 한인전체대회를 소집해서 총선거를 실시했다.  나는 미리 해방된 조국을 다녀와야겠다는 이유를 들어 피선을 예방공작을 하였다. 

지금까지는 내가 이 고장에서 지도적 인물에 처해왔지만 비상시국에 있어서는 비상적 인물이 필요한 것이고 나보다도 유능한 인사도 있을 것이라 여기고 태연히 대회장에 나갔는데 주민은 운집하였고 선거는 시작되었다. 어수선하고 위험한 판국이라 무 입후보 비밀투표로 진행하게 되어 나는 심중 불안을 느껴 다시 한번 나의 태도를 밝히는 동시에 선거 진행에 관해 당부를 하였다. 그러나 개표를 하고 보니 내가 최고득표로 당선이 되였다. 어찌하랴 그래도 맘이 내키지 않아 여러 가지로 사정을 말하고 사양을 해보았으나 「출발하는 날까지」라는 조건하에 울며 겨자 먹기로 고려인회장에 취임을 하게 되였다.

해방된 조국의 국호가 무엇일까?  동진(東震)이다. 아니 동화(東華)다. 아니 한국(韓國)이다. 등등 설이 구구하여 미지기상(未知基詳)으로 알 도리가 없었다.

서양 사람들이 말하는 코리아, 중국인이 부르는 꼬-리를 상기하고 고려인회라고 명칭 하였다.

그리고 부회장에 崔京化(노어에 능하여 통역직을 겸임)를 임명한 후 여러 가지 부서를 두고 조직을 만들어 자치적으로 교민들의 안전을 위하여 당일로 기능을 발하니 그 직능은 광범하고 직권은 엄청난 것이었다.

이 평산에 주둔한 노(露)병들은 빈민층이 아니면 부랑자 죄수로 편성되어온 놈들이라 거칠고 우악하고 문란하였다. 쌀 바치라. 돈 해오라. 돼지니, 소니. 달라는 것도 하도 많다. 우리 힘으로 너희들이 해방 되었다 하면서 매일같이 성화를 해대는데 학을 땠지만 그보다도 부인네를 노리는데 큰 골치를 앓았다. 

생각한 끝에 한 꾀를 내어 할빈에 가서 화류계 여인을 돈 주고 데려다 노(露)수비대장에게 주어 살림을 차리게 하고 부하에 대해 철저한 단속감독을 당부했더니 그 뒤 우리에게는 불상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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