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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에 중국 땅을 밟고 (3) [111호] [옛날이야기]
2007-01-18 10:35:46

90년도 초에 천진역에서 북경 가는 중국버스가 있었는데 기다려도 사람이 차지 않으면 주위의 골목을 한 바퀴 돌고 제자리에 돌아와 다시 사람을 기다려 보조의자 까지 꽉 차야 떠났다. 그러니 언제 출발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때는 고속도로가 없어 국도를 따라 가야 했는데 시속 40km 로 가니 북경에 가면 당일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그때의 중국버스는 냉난방이 없는 차이기에 여름은 그런 대로 문을 열고 가니 바람이 들어와 견딜만 했으나 겨울에는 난방이 없어 버스의 창문을 꼭 닫고 가는데 앞뒤에서 연신 독한 담배를 피워대는데 나중에는 앞사람의 뒤통수도 안보일 정도가 되어 눈은 따갑고 목은 연기를 마시니 기침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엄동설한에 문을 열수도 없고……어쩌겠는가. 타국인데 항의할 수도 없고 그냥 참아야 했다.  참으로 고문도 그런 고문이 없었다.  

1992년 북경서 양촌까지 고속도로가 완성되었다. 나는 천진시에 가서 한국의 고속버스를 도입하면 안 될까 하고 상의를 하였다. 우선 깨끗하며 정시에 떠날 수 있고 냉난방장치가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건의를 하였더니 관계서류를 들추며 아직 중국의 법에는 외국인에게 교통관계에 대한 사업의 허가를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 무렵 북경일보에 아는 분이 있어 북경시에 알아봐 달라고 의뢰 하였더니 북경시 역시 중국법규에 외국인에게는 교통관계합자를 허가할 수 없다는 회답이 왔다. 

단념을 하고 있었는데 1992년 9월에 북경에서 한국의 나의 사무실로 국제전화가 왔다. 중국정부에서 93년도부터 외국인에게 교통관계 사업을 개방한다는 소식이 있으니 빨리 들어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한달음에 북경으로 달려갔다. 우여곡절 끝에 북경시와 계약을 성사시키고 북경시 정부인사 일행 수십 명이 서울에 와서 롯데호텔에서 조인식을 하였다. 이것으로 한국과 중국의 고속버스 합작이 사상최초로 성립되어 한국의 고속버스가 북경의 북경일보 앞에서 출발하여 천진의 紅旗路에 있는 天環長途汽車站까지 왕복하는 한국과의 합작한 고속버스가 탄생하였다. 손님이 한사람만 타도 정시에 출발하였고 유니폼을 입은 예쁜 안내양이 있었으며 녹음테이프에서는 한국의 고속버스를 소개하는 어여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리고 나서 나는 천진시를 찾아갔다. 북경은 이렇게 고속버스가 합작이 되었는데 천진시는 아직 안되냐고 했더니 북경시와의 합작계약서 사본을 보더니 북경이 되면 천진도 할 수 있다하여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가서 K고속을 찾아갔다. 그때 K고속에는 우리 큰아들의 친구가 있어 쉽게 상담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천진시와 K고속이 합작한 고속버스 회사가 탄생 하였다. 그때 이 일을 추진하기 위하여 같이 고생하신 K고속의 S常務를 잊을 수가 없다. 처음 이 일을 서울사무실에서 만나 상담을 할 때 과연 중국하고 합작이 성사될 것인가 무척 의심하였다. 중국의 당사자가 천진시라 했더니 나보고 진짜로 천진시와 직접 할 수 있냐고 몇 번이나  되묻곤 하였다. 이유인즉 심양시와 고속버스 합작건에 대하여 일을 추진 한 적이 있었다 한다. 조선족이 심양시와 고속버스합작을 추진하여 준다하여 같이 심양까지 갔으나 심양시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귀국했다 한다.  조선족이 심양시와 연결시켜 줄테니 미리 소개비로 80만원을 달라고 했다 한다. 하도 어이가 없어 허탕만 치고 돌아간 적이 있었기에 나도 같은 맥락에서 의심하는 것이었다. 나는 웃으며 걱정 말고 같이 천진을 가보자고 하여 같이 천진에 와서 천진시의 교통국장을 같이 만났다. 그제야 나를 믿고 적극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사람은 중국에 오면 조선족이 있어 통역을 하여주어 우리보다 20년 일찍 진출한 일본사람들 보다는 중국진출이 아주 수월하였다. 해방 후 한국은  6.25라는 엄청난 시련 속에 미국이라는 나라를 접하게 되었고 그 후 눈부신 발전으로 세계화가 이루어져 언어의 변화가 너무나 많았으나 조선족은 외국과의 단절된 50년 동안 언어가 동결 되여 있었기에  한국과는 너무나 많은 차이가 있어 한국사람의 말을 100% 알아듣는 조선족은 그 무렵에는 극히 드물었다. 지금은 조선족이 한국에 많이 갔다왔다 하고 있으며 또 한국기업에 오랫동안 같이 일을 한 사람들이 많아 이러한 불편함이 많이 해소되었다.

이러한 현실을 알고 있었기에 K고속에서는 천진시와 합작을 추진할 때 통역을 두 사람 썼다. 한사람은 조선족이고 한사람은 한국의 외국어대학 중국어과를 졸업한 사람이었다. 조선족은 중국어를 한국사람에 비하여 잘 이해 할 것이고 한국사람 통역은 한국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항상 두 사람을 대동하였다. 

드디어 합작이 성사 되어 解放南路에 있는 公共汽車第一站에서 출발하는 고속버스가 운행을 시작 하게 되었다. 

한국같이 정시에 출발하는 깨끗한 버스로 쾌적하고 즐겁게 북경에 당일로 갔다올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과 내가 이 일을 드디어 해냈다는 만족감에 너무나 가슴이 뿌듯하였다. 

그런데 북경의 경한고속이 문제가 생겼다. 한국측 파트너가 유명한 정치가의 L씨의 동서였다. L씨와 같은 서울대 법대 출신이요 L씨 에게 처제를 소개시켜 동서가 되었다 한다. 그런데 L씨는 고시에 합격하여 승승장구 출세를 하고 있었으나 이분은 번번이 고시에서 떨어져 백수로 지내다가 L씨의 배려로 여러 군데의 월급쟁이 사장으로 전전하고 있었다. 이분이 내가 중국에서 고속버스 합작 건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를 찾아 왔다. 

나는 그때 한국의 파트너를 어느 고속버스 회사를 선택할까하고 찾고 있던 때라 그분이 할 수 있다하여 만나 보았더니 자기소개와 한국쪽일은 염려하지 말고 중국 쪽만 신경 쓰면 된다고 큰소리를 하였기에 나는 그를 믿고 일을 추진하였다. 

중국하고 Fax가 오갈 때마다 꼭 내 이름 밑에 자기 이름을 넣어달라고 하여 그리하여 주었다. 그분은 전에 중국여행을 왔을 때 통역을 해주었던 조선족 아가씨를 양딸로 삼고 데리고 다녔으며 일이 마무리되고 조인할 때 한국 측 대표로 그분의 이름을 넣어주었다. 그리고 한국의 고속버스가 중국으로 수송 되여오고 정상적으로 운행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큰소리는 쳤으나 워낙 돈 없이 시작 하였기에 자본주를 찾고 있었으며 그 대상자의 한분이었던  K사장이 경한고속에 대하여 문의하고자 나의 서울 사무실을 찾아 왔었다. 그 후 합작 조건이 맞질 않아 K고속과의 합작은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이것이 나와  K사장 및 B회장을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K고속과의 일은 성사 되지 않았으니 대신 중국에서 무언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을까 하기에 중국으로 같이 와서 북경과 천진을 구경 시켜주었다. 

구경을 다하고 난후 저녁을 같이 먹으며 B회장이 천진서 조그마한 호텔을 하나 개조하여 운영 하고 싶은데 어떻겠냐 하며 마땅한 곳을 하나 물색하여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 후 호텔이 성립되기 전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시내의 한 조그마한 호텔에서 K사장과 같이 아침에는 한 그릇 1원 짜리 훈둔(馄饨)을 사먹으며 함께 고생했던 그때가 새삼 그리움으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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