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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 대한 추억 -4 [120호][옛날이야기]
2007-10-16 17:20:47

아버지에 대한 추억 -4

아버지께서 사놓으신 서문밖 논은 얼마나 되는지 나는 잘 모른다. 이 논들의 물줄기는 성밖의 북쪽에서 서쪽으로 휘감아 돌아 흘러가는 강물을 논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이 강에는 고기들이 엄청 많았다. 가끔 팔둑만한 잉어가 논으로 흘러 들어와 시꺼먼 등을 물위에 들어내고 논을 휘젓고 다니면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긴자루에 달린 손바닥만한 삽으로 등을 후려쳐서 잡곤 하였다. 그리고 가을에 논의 물을 빼기 시작하면 논에 있던 물고기들이 (주로 붕어와 메기) 물이 떨어지던 웅덩이에 모여 들면 고기반 물반이 되었다. 농약도 비료도 없이 짓는 논이니 고기들도 살 수 있는 그러한 농사였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총출동하여 양철통에 퍼담아 우차로 싣고 와서 싸리에 꿰어 가을 햇볕에 말려 보관했다가 기나긴 겨울에 튀겨먹곤 하였다.

이 논들은 한국에서 맨 주먹으로 만주로 온 젊은이들에게 한사람당 30마지기씩 빌려주고 농사를 짓게 하셨다. 볍씨부터 모든 것을 빌려주고 가을에 타작할 때 소출의 반반씩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었다. 맨주먹으로 온 젊은이들도 한 두해 농사를 지으면 생활이 안정될 수 있었다.

농사짓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였다. 우선 눈이 녹고 땅이 풀리면 논을 갈고 물을 댄후 써래질로 평평하게 한 후 몇일을 기다렸다가 피가 자라 물위로 솟아오르면 자루가 긴 큰낫으로 물위를 휘젖고 다니면 피가 낫에 걸려 전부 뽑혀나온다. 그후 모는 심는 것이 아니고 물에 담구어 두어 싹이튼 벼씨를 논에 훌훌 뿌리고 다니면 된다. 모심기도 안하고 논도 안매고 비료도 퇴비도 없이 하는 농사이니 아주 편하게 농사를 질 수가 있었다.

나락이 익고 서리가 오면 추수를 하는데 타작을 논에서 직접 탈곡기(발로 밟으면 윙윙 소리나는 기계)를 이용하였으며 그 자리에서 바람을 이용하여 쭉쨍이를 날려보낸후 마대에 담아 저울로 달아서 둘이 반반씩 나눈다. 이 나락은 보관하였다가 수시로 정미소에서 정미를 하면 되었다.

아버지께서는 만주로 이주하게 된 동기중 하나가 15년의 교편생활에 실증을 느껴 월급쟁이 생활을 탈피코저 했던것이였는데 또다시 이곳 소학교의 교장을 맡게 되는 사건이 생겼다.
그때의 사정을 아버지의 회고록에는 이렇게 적고 있었다.

『이곳 평산교포국민학교교장 이규선(李圭善)은 성질이 유별하여 지방인사와 뜻이 맞지 않았다. 쓸데없이 자손심만 강하고 고집불통으로 타협과 유화를 결하였다. 학부형들은 심지어 학생을 보내지 않고 퇴학 혹은 만인학교에 전학시키며 청년층은 직접 행동을 취할 기세를 보이고 다가오는 입학기에 입학을 보이콧트할 조짐까지 보이게 되자 유지들이 크게 사태를 우려하여 나에게 의논을 하러 오는 이도 있어 같이 걱정도 했었다. 그러던 하루는 계근식(桂根植)조선인구 區長(주:평산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대표)이 내방하여 학교의 형편과 사정을 말하며 교육위기를 나에게 바로잡아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나의 전력(前歷)을 누가 발설했는지 난감하게 되었다. ‘감사하지만 방치할 수 없는 사태인 것도 알고 있기는 하오마는 다른 사람을 물색하라’고 내 형편에서 애원을 했다. 월급쟁이에 실증을 내고 이것을 면키 위해 이역만리 여기까지 왔는데 그리고 건강이 좋지 않아 건강 회복증진을 위한 이주인데.......

그들은 내 강경한 거절을 받고 일단은 물러가오만 동포를 위해서 잘 생각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가더니 얼마 후에 2차 내방을 받았다. 가까스로 얘기하여 돌려보내기는 했으나 그날 밤은 전전반측 잠을 못잤다.
이리하여 삼고루옥(三顧累屋)을 받자 그들의 성의를 무시할 수도 없고 또 아동을 위해서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조건부로 수락을 하고 학교장에 취임하였다.

교장취임조건부 승낙이라 함은 「李교장를 영전 시킬것, 현재의 악화된 분의기가 호전 되는날까지 재직한다」라는것이다.

李교장은 나를 크게 오해하고 찾아와 억담을 하기에 남을 오해만 하지 말고 자기 반성과 지방공기를 좀 살펴보라고 말하고 시일이 가면 자연 알게 될 것이고 그때는 나에게 도리어 감사를 하게 될 것이라고 일러 보내기까지 하였다.

열심이 집무하여 불과 1년만에 아동수가 배가 하고 교원수도 따라서 배가하였다. 교사가 협소하여 바로 교사신축 추진회를 조직하니 지방민의 성심도 대단하였다. 부지를 북문 밖에 넓게 잡고 공사에 착수하게 되었을때 나는 결연히 사의를 하고 말았다.
부현장인 五十住(이소스미)씨왈「이젠 어쩔 수 없구만. 반 년 전부터 그만두겠다는 것을 만류했지만 그대가 그만둬도 이젠 내가 맘을 놓겠어..... 기왕이면 신교사도 낙성될것이고 좀 더 수고를 해달라고 하고 싶지만.....허허.........」 (주: 그 무렵 만주는 일본이 점령하여 현장, 성장은 중국인을 세우고 부현장, 부성장은 전부 일본사람들이 장악하여 사실상의 실권을 쥐고 있었다)

학교장 퇴임후 학부형회장에 피선되어 내가 발족을 추진했던 신교사 건축을 완공하였다. 벽돌집으로 교실 6, 사무실 1, 사택겸 숙직실 1, 변소 2개 등 나의 설계에 의해 훌륭한 외관을 가진 건물이었다. 낙성식에 참석한 사람 모두가 새로 지은 학교에 너무나 감격하였다. (주: 나는 4학년 2학기때부터 새로지은 학교에서 배울 수가 있었다.)

당초 意思인 자유를 갖기 위하여 아무런 공직도 명예직도 안하기로 작정을 하였었으나 무직이어서는 안되겠기에 代書業을 허가를 얻어 시작하는 한편 정미업을 돌보는 일방 만척관리인이 됨을 계기로 수전개간(水田開墾)을 대규모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모든 것을 사양해도 안되고 결국각 방면에 전부 관련을 하게 되는데 대부분이 무보수라 식소사번(食少事繁), 매일같이 조출모귀(早出暮歸)라 한가한날이 없었다.』

이렇게 아버지께서는 평산에서 유지로 해방이 될 때까지 8년 동안 바쁜 나날을 보내시고 계셨으나 해방이 된 후 다시 한번 인생의 대변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더는 이곳에 머물수 없음을 깨달으시고 해방이 되였으니 고향을 방문 해야겠다는 핑게로 막내 여동생만 데리고 한국으로 떠나셨다.

그리고 나는 17살에 의용군으로, 형님은 간부훈련소로 차출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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