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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 대한 추억 -3 [119호][옛날이야기]
2007-10-16 17:24:26

아버지에 대한 추억 -3


내가 1학년을 다니던 이곳 대정리는 아버지께서 세우신 간이학교가 있었지만 면소재지까지는 20리, 군소재지까지 30리를 높은 고개를 넘고 내를 건너 길옆의 풀잎에 맺은 이슬로 바지를 적시며 걸어서 가야 하는 참으로 하늘만 빠끔히 보이는 두메산골이었다.

산골짜기에 있는 천수답(가물어서 6월이 지나고 7월에도 비가 안 오면 모를 못 심고 조나 메밀을 심어야 하는) 논들과 산비탈에 개간한 밭이 전부요, 생계를 유지코자 남자는 산에서 나무를 또는 금강에서 잡은 물고기를 지게에 지고 여자는 산나물을 머리에 이고 40리길인 대전(大田)장에 갔다 팔아서 용돈을 쓰는 아주 찢어지게 가난한 마을이었다.

그때 우리 집에는 라디오와 유성기와 재봉틀이 있었다. 라디오는 상자로 되어 있었으며 뉴스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였고 유성기는 손으로 손잡이를 돌려 태엽을 감고 동그란 머리에다 바늘을 꼽고 유성기판에 살짝 올려놓으면 노랫소리가 나왔다. 동네사람들이 와서 너무나 신기하다고 하며 더러는 뒤에 사람이 숨어서 노래하는 줄 알고 뒤를 들여다 보곤 하였다.

1938년 봄 내 나이 9살 때 우리 식구는 신천지인 만주로 이주하게 된다.

이때의 상황을 아버지의 회고록에는 이렇게 적으셨다.

“교원생활을 청산할 날도 점차 가까워왔다. 그러던 어느 봄날 천만뜻밖에 작은아버지께서 찾아오셨다. 옥천에 있을 때 살길을 찾아 만주로 떠나가신 숙부가 10여년 만에 오신 것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여러 가지 말씀을 듣고 나는 국내서의 전직을 단념하고 일인이 희소한 그리고 무대가 넓은 만주로 가서 자유 활동을 하며 보람 있는 후반 여생을 영위하리라 작정을 했다. 앞으로 1년이면 은급 연한도 차게 되니 명년에 이주하기로 하고 우선 정미업을 할 양으로 정미기계를 사서 金炯天(친척 존함)을 딸려 숙부와 함께 만주로 떠나보냈다.

계획과 진로가 결정되니 마음이 후련했다. 해가 바뀌어 1938년이 되고 3월이 되었다.  만주로의 출발은 2차로 나눠 金南奎(아버지의 수제자)군의 소망을 들어 부모와 종욱형제를 안내시켜 입만(入滿)케 하였다.  3월도 말일, 이날은 재직 만 15년이 되는 날이다. 회고하니 감개가 무량하다. 남의 사표가 되기 위하여 주초(酒草)를 일금하고 색기도 멀리 하였다. 언어행동을 극히 삼가하고 독서와 연구와 수양에 전심 하였다. 시원섭섭하다고 할지 미련 없이 홀가분한 심경으로 고국을 뜰 수 있었고 미지의 앞날에 적잖은 희망을 갖기도 하였다.“

위에 적은 것처럼 부모님보다 앞서 우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같이 기차로 만주로 떠났다. 도착한곳이 할빈 아래에 있는 阿城縣平山里였다. 이곳은 우리가 상상했던 그 넓고 넓은 만주 벌판이 아니라 산이 있고 냇물이 흐르는 아기자기한 곳이었다. 사방에 토성을 쌓아 동서남북에 성문이 있었고 사거리 한복판에는 높은 망대가 있었다. 성 밖으로 북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냇물은 아주 깨끗했으며 물고기가 너무나 많았다. 이 냇물은 아버지가 사놓으신 우리의 논에 물을 공급해 주었으며 봇도랑의 말뚝 옆에서 물놀이를 하면 가랑이 밑으로 팔뚝만한 메기가 꿈틀거리며 지나가곤 하였다. 우선 우리 형제는 이 고장에 있는 조선인 학교에 입학하였다. 나는 1학년을 다녔다 했더니 2학년에 편입됐고 형님은 2학년을 수료 했다 하니 3학년에 편입됐다.  그러나 나는 벌써 한국에서 3학년과정을 다 수료했기에 2학년수업은 너무나 쉬웠다. 덕택에 나는 그저 놀며 다녔건만 6학년 졸업 때까지 항상 1등을 하였고 형님도 다음해에 월반을 하였으나 역시 항상 1등을 하셨다. 조기교육이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때 상황을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적으셨다

“이때인즉 일본이 만주를 점령해서 만주제국을 건설해 놓고 중국본토를 승승장구로 쳐들어가며 전과를 올리는 판이었다. 함경선은 처음이라 창밖의 북방풍물에 피로한 줄도 모르고 국경을 넘어섰다. 간도일대의 경계는 삼엄하였으나 동경성을 지나 목단강의 파괴된 모습을 보면서 일면파(一面坡)를 통과하여 일차 목적지인 작은아버지가 계신 주하하동(珠河河東)에 무사히 도착 하였다. 차속에서는 철도경호대와 군대가 와글와글 하였고 역마다 소년철도단이 활약하는 것이 눈에 띄였다. 주하역에서 현지인 마차위에 실려 하동(河東)17계(契) 20리길을 유유히 달리니 북국의 8월 중순은 따스한 got빛이 제법 가을 맛을 풍겨주었다.
이곳 하동은 우리 동포의 이민농촌으로서 1,000여 호가 짓는 수도(水稻)의 평원광야는 끝이 안보이도록 넓다. 앞으로 반달이면 베게 될 나락이 고개를 숙여 산들바람에 황파(黃波)를 이뤘다. 약 3만 두락이나 되는 큰 들은 나는 처음 보았다.“

아마도 아버지께서는 충청북도의 산골짜기에서 15년 동안 교편을 잡았기에 이토록 넓은 만주벌판을 처음 보시고 감탄 하셨으리라. 그리고 평산에 도착후의 소감을 다음과 같이 적으셨다.

“하루를 쉬고 곧 식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평산(平山)을 향하였으며 오랜만에 만난 식구들이라 너무나 반가웠다. 이때는 만주국의 건국 초인지라 너무도 유명한 마적(馬賊)의 땅은 아직도 대소의 도적들이 빈번히 출몰하는 판이어서 일병은 만주경찰과 합동해서 소탕을 하는 중인데 잡은 도적의 목을 시가지 성문(城門) 높이 매어 달아 놓고 오가는 사람들이 널리 많이 보게끔 하는 것이었다. 이 평산(平山)은 그리 크지 않은 빈수선(濱綏線)의 한 역으로 시가지는 사방을 토성으로 둘러쌓고 네 군데 문이 있어 무기를 든 자위단이 이 성문을 지키고, 중앙의 사거리 복판에는 높은 포대(砲臺)가 있어 등대망원(登臺望遠)경비를 하게 되여 있다. 전시(战时) 기분이다. 거리에는 전포, 관자(館子), 객전(客餞)등이 제법 즐비하여 시가지 풍경을 이루고 있다.  상권은 전부 현지인이고 우리 동포들은 대부분이 개척민으로 영농에 종사한다. 이곳 인구는 현지인이 약7만 우리 동포가 2천 일본인과 러시아인이 약간씩 있다. 이를 통제하고 계도하고 관할하는 기관으로는 경찰서, 촌공소, 협화회, 흥농회 등이있고 역, 경호대, 학교, 사원 등 이 있다. 나는 거리도 익히고 구경도 하며 안면도 얻기 겸, 가끔 집을 나서 산책을 한다. 관헌에 들어가 인사도 하고 상점에 들어가 필담도 해본다. 접대가 온근하다.

서문밖 농장도 자주 나가 보는데 나락의 성숙도가 빨라 아침에 다르고 저녁에 다르다. 그러다가 나락도 익어 수확을 하게 되고 계절은 바뀌어 한절(寒節)은 한절(閒節)을 가져온다. 집집이 50石내외의 수확을 해놓고 한철 노력으로 1년 생계를 마련하는 식량이 풍족한지라 인심이 순후(純厚)하다. 추위도 듣기보다 지내보니 꽤 견딜만 하다. 한난계로는 영하30도를 내려가지만 심적으로 도사리고 옷단속과 가옥구조가 생활기거에 알맞도록 되어 있는 탓이겠지?

정미업은 순조롭게 잘 되었다. 나는 기계와 기름을 대고 작은 아버지께서는 미곡의 출납 및 보관을 맡으시고 김형천(金炯天)은 운전기술을 이렇게 세 몫 3인이 운영하는데 1년 내내 쉴사이없이 돌아간다,  광활한 지역에서의 느긋함과 자유의 기분...  신천지에 와서 희망과 만족한 느낌을 맛본다.“

이렇게 만주생활이 시작 되었으며 아버지의 새로운 사회생활이 순조롭게 진행됨으로 인하여  전시하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남부럽지 않는 소년시절을 보낼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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