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글마당

실로암쉼터
전체글 수: 25
아버지에 대한 추억 -6 [122호][옛날이야기]
2007-12-18 10:13:51

아버지에 대한 추억 -6

평산(平山)이라는 곳은 만주 벌판이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산이 있고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아기자기한 살기 좋은 곳이었으며 인심 또한 후한 곳이었다.  이 살기 좋은 곳을 아버지께서는 그동안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귀국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때의 상황을 아버지의 회고록에 이렇게 적으셨다.

일본이 패망하니 만주국은 자연 해체되고 중국은 각지에서 중앙군(장개석군), 팔로군(공산군)이 서로 교전을 하게 되었는데 봉천이 어떻고 할빈이 어떻고 하는 소문이 전해왔다. 라디오도 신문도 없고 풍문과 구전으로 전해 들으나 사람 왕래도 두절상태라서 정확한 소식을 알 도리가 없었다. 시국이 어수선하니 고국으로 귀환하겠다는 동포가 많아 고려인회서는 소련군과 교섭하여 제일차로 약 50여명 제2차에도 약 100여명을 조국을향해 떠나보냈다. 그러나 철도권을 장악한 소련군은 전리품(일본군시설물. 만주국재산)을 매일매일 연달아 소련으로 실어 가느라고 교통이 질식 상태에 있어 동포수송에 애로가 컸음은 물론이었다. 가지 못할 사람은 빼놓고 제3차로 갈 사람의 마감수송을 위하여 추진 중이었다.

이곳 평산에도 차차 공산 바람이 불어오기 사작하더니 (원주민은 오히려 잠잠한데) 우리나라사람의 독립동맹이라는 것이 침투해와서 고려인회에도 이러쿵 저러쿵 간섭을 하기 시작하였다. 심중에 느끼는바 있어 회장직을 부회장인 최경화씨에게 가까스로 인계하고 은퇴하였다. 그러다보니 이해도 저물어갈 무렵 여기도 팔로군과 중앙군(실은지방세력)이 전투가 벌어져 지방 세력이 패주하니 더 한층 소란하여 수라장이 되었다. 한동안 있으니 지방군이 세력을 만회하고자 반격을 가해 이번에는 8로군이 격퇴를 당하였다. 이렇게 톱질전쟁을 수차 겪고 나니 혼란이 극에 달하고 무질서하기 말할 수가 없었다.

밤에 교전이 있을 때는 유탄을 피하느라 잠을 못자고 낮교전이 있을 때는 봉적을 두려워 불안에 떨며 옷은 물론 신발도 신은 채 겁에 질리고 추위에 부들부들 떨며 한겨울을 경과 하였다. 속내의와 방한복은 다 가져가고 밥 짓고 잠재우기 정말 고역이 컸다. 그래도 부녀자만은 괴롭히지 않아 불행 중 다행으로 여기고 감사했다.

해가 바뀌어 전쟁은 뜨막해 졌으나 독립동맹은 더욱 기세를 부리며 세력을 확대하여 이들을 따르는 무리가 날로 많아졌다. 김용각(金龍珏)이란 사람이 책임자였다.  나를 가끔 찾아와서 동무 같은 분이 들어앉아서는 안 된다는 둥 손잡고 조국광복을 위해 투쟁하자는 둥 여러 가지로 회유하고자 하였으나 나는 좋은 말로 꾸며 회피를 하였다. 

진작부터 나를 도피할까 하여 감시를 받게 된 것을 알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 나는 집을 새로 사서 새집으로 이사하면서 마당복판에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 「여보아라 나는 도피할 사람이 아니고 이곳에 안착해 살 사람이니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감시의 눈이 좀 완화된 틈을 타서 나는 어른들과 의논하고 부모 처자식과 친척들을 다두고 제3차 수송단에 끼어 야간 차편으로 귀향길에 올랐다.

평산에는 많은 중국인 친구가 있었다. 특히 나와 같은 성씨인 임보수(林寶樹)씨는 매일같이 나를 방문하여 귀국하는것을 극구 만류하였다.

이 사람은 만인이지만 동성이라 하여 동조지손(同祖之孫)의 의(誼)로 매우 친근히 지냈다. 업은 의술이며 한문에 능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제 일본이 망했으니 불원장래에 또다시 너희 나라의 영토가 되는 시기가 곳 도래 된다고 본다. 남들은 다 가더라도 당신은 함께 여기서 살아 뒤에 영화를 같이 보자  당분간은 난관이 있을지 모르나 우리가 극력 보호해 줄것이니 그 대신 좋은 세월 만나거든 우리들을 돌봐 달라.」  이 임씨뿐 안이라 王永. 張亞東. 王仲三 같은 이도 역시 비슷한 말로 내가 귀국할가 싶어「임회장은 철귀(撤歸)하지 말고 같이 살자, 시국이 소란하긴 하지만 잠시일 것이며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절대 안심하라 다행히 견디다 보면 좋은 세월도 만날 것이니 그때는 네 덕을 보겠다.」고 만류를 받았지만 만부득이 눈물을 삼키며 모두에 인사도 못하고 아무도 모르게 한사람의 전송도 없는 기막힌 마지막 길을 떠나고야 말았던 것이다.

어린 종린이(주: 막내 여동생, 당시 11살)만 데리고 ... 어린것 속옷속에 감추어 가지고.. 권구(眷口)를 버려두고 친구를 속이고 부득이 떠나지 아니하면 안될 이유가 있으니 이것만이 가족과 친지를 건지는 길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는 눈을 감고 뒤에 남겨둔 부모처자들의 무사안녕과 후일 기쁨의 재회가 있기를 빌며 기차역에서 밤차에 올랐다. 이것이 1946년 3월5일 아직 칠흑같이 어두운 이른 새벽인 북만은 아직도 설만천지(雪滿天地)요 빙동산야(氷凍山野)였다.

평산아 잘있거라 나는 이제 떠나노라.
뉘라서 정든곳을 즐기며 뜨랴마는
세상이 하도 어수선하여 올동말동하여라.

기적일성(汽笛一聲)에 기차가 떠나니 평산(平山)은 차츰 멀어져 간다.. 8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이루어놓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쫓기듯이 홀로 떠나야 하는 내 신세가 한심스러워 한숨이 절로 나왔다. 부모처자 삼, 사, 오, 육촌.(三四五.六寸) 그리고 가깝고 먼 인척(姻戚)들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내가 보호(保護)하고 영도(領導)해온 교포(僑胞)들. 생사고락(生死苦樂)을 같이 하자고 불안(不安)한 기색(氣色)으로 애원(哀願)하던 선량(善良)한 그네들의 얼굴. 미안(未安)한 생각 죄스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할빈에 도착하였다. 피난민(避難民)으로 역내(驛內) 역외(驛外)할것 없이 인산인해(人山人海)로 크게 혼잡(混雜)을 이루고 있으니 자연히 사고 또한 많이 발생하고 있었다.  물건 잃은 사람 돈 뺏긴 사람 등 아우성이다. 나도 지갑<중요(重要)한것>을 소매치기 당하고 추격을 하다가 다른 짐까지 잃을까봐 되돌아오고 말았다.  

상인들은 돈벌 기회인 이때를 놓칠세라 인력거(人力車)삯, 역마차 (驛馬車)삯, 방세, 밥값 할 것 없이 턱없이 부르는것이 값이요 안내고는 못 배기는 판이다. 돈 준비는<지화(紙貨)>등으로 대부분을 종린(鍾鄰)이 옷속에 누벼 감추었으나 할빈와서는 일부는 경면주사(鏡面朱砂)약으로 바꾸기도 하였다.  소련군이 철로교통을 장악하여 전리품 (戰利品)을 소련으로 수송(輸送) 하느라 객차의 수송은 뒷전이 되니 객차운행이 엉망이여서 가다가는 쉬고 또 좀 가다가는 묵고 하는데 객전(客餞=간이 숙소)에 들어가도 초만원으로 콩나물시루 같이 날을 새우고.. 그도 안되는 날은 역사(驛舍)안에서 사람들이 꽉 차서 몸을 서로 맞대고 쪼그리고 앉아 밤을 지새우니 3월달이지만 아직 겨울날씨인 이곳이 얼마나 추운지 고생 이란 이루 형언(形言)할 수 없고 기지사경(幾至死境)이였다.

 

추천 : 0
코멘트 0
번호
제목
글쓴이
일자
추천
25
2009-01-03
0
24
2008-10-29
0
23
2008-08-25
0
22
2008-07-23
0
21
2008-07-23
0
20
2008-03-20
0
19
2008-02-22
0
18
2008-01-18
0
17
2007-12-18
0
16
2007-11-19
0
15
2007-10-16
0
14
2007-10-16
0
13
2007-08-16
0
12
mk
2007-07-16
0
11
2007-07-09
0
10
2007-07-09
0
9
2007-04-18
0
8
2007-03-16
0
7
2007-02-13
0
6
2007-01-18
0
 
CopyrightⒸ by TJPlaza 2014.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