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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 대한 추억 -8 [124호][옛날이야기]
2008-02-22 18:15:02

아버지에 대한 추억 -8

그때의 정황을 아버지께서는 수기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었다.

“식구가 모였으니 앞으로의 생활을 어떻게 해야하나를 생각하였다.  앞으로 공직에는 안 나기로 결정을 하였으니 방아실에 정착키로 하였다.  만주로 이주할 때 이곳에 있는 산과 전답을 이곳에 살고 있는 류인수(柳寅壽)에게 맡기고 떠났었다.  

그래서 류인수네 사랑채에 우선 입 주(入住)하기로 했다. 류인수의 부친 재호(在浩)씨는 우리가 만주에 있을 동안 토지와 산림을 맡아 8년동안 수고를 하신 분이다.

그런데 한해도 소작료를 제대로 받아본 적은 없었다. 감수(減收)로 인해서 토지를 덜 받았다.  재해가 심해 전면(全免)했다고. 그 때문에 전부를 매각(賣却) 해서 만주 현주지(現住地)에 대토(代土)를 해볼 까도 생각해본 바도 있었으나 어른의 만류로 그만 두었으니 천만다행이랄까. 이 고장에 다시 와서 살게 되다니... 생각하니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지방인들의 환영과 협조로 집을 짓고 영농을 시작하였다. 집의 재목도 내 산에서 준비해서 석가래 다듬는 것 등은 부자(父子)가 했지만 목공과 토역 등은 제자와 동네 사람이 모두 나와 봉사하여 주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농사의 씨앗은 전부 조금씩 집집마다 얻어 모아서 시작했는데 내가 농사일을 전혀 할 줄 모르고 또 천만가지 구비가 맞지 않아 애를 먹었다. 식량은 궁핍하여 문자 그대로 초근목피(草根木皮) 로 고생을 하였다. 이때는 라디오는 물론 신문조차 없어 자세한 것은 알 수 없고 따라서 상세한 기록은 할 수 없지만 지극히 정국이 혼란 하였고 정당이 4~50개이나 생겨서 저 잘났다고 떠버리고 모두가 애국자요 모두가 독립 운동가요, 그래서 반목과 갈등 모략과 음해가 횡행 하였다. 

그리하여 여운형(呂運亨)씨가 쓰러지고 송진우(宋鎭禹)씨가, 그리고 장덕수(張德秀)씨가 피살, 이리하여 중요한 인물들이 하나둘씩 피화(被禍)를 입었다.

여기서 아들 얘기를 기록한다.

식구들이 평산을 떠날 때 종욱(鍾郁)은 이미 간부 훈련소(幹部 訓練所)에 나가 있었고 종태(鍾邰)는 아성(阿城)에 경비대로 입대해 있었다. 종태가 9월12일 밤에 친구 함군(咸君)과 탈주(脫走)하여 할빈에 있는 당숙(仁圭)을 찾아가서 함께 한국으로 출발하려고 준비 중, 제 형이 찾아왔다한다. 정말 기적적인 상봉 이다. 제형은 합숙소에서 훈련을 받는 도중 설사병이 나서 사람이 못쓰게 되니까 친척이 있거든 거기 가서 치료한 후 오라고 해서 오는 길이였다 한다.  천우신조로 형제가 만나 당숙과 함께 귀국의 길에 올랐다. 이것이 9월 24일, 여러 날 걸려 용정(龍井)에 닿으니 동절(冬節)이 되어 길도 막히고 부득이 겨울을 여기서 나는데 엿장수를 해서 연명을 하니 고생이 일구난설(一口難說)이다.

봄이 되어 4월18일깨 두만강을 건너 회령을 거쳐 청진, 함흥, 철원을 기차도 타고 혹은 걷고 요행이 방에 서도 자기도 하고 또는 노상에서 밤을 지내기도 하며 서울에 닿은 것이 1947년 5월3일 이다.

청주를 거처 집에 도착 한 것이 5월 18일, 3년 만에 전 가족(全家族)이 한데 모이니 조상의 은덕이요 가호임을 감사하였다. 이로부터 귀농생활이 시작되었다. 몇 해 고생 하노라면 나라의 질서도 잡힐 것이고 그간에 통일도 될 것이니 그때를 보아서 사회로 진출 하자는 묵계(黙契)하에...

위탁통치(委託統治)문제로도 시끄러웠던 모양, 이쪽에서 반탁(反託)이다 저쪽에서는 신탁(信託)이다 그리고 남북협상(南北協商)도 말성이 많다.  

김구선생(金九先生)이 이북을 갔다 오기까지 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했을 뿐 않이라 양단(兩斷)형세는 더욱 굳어 가기만 했다. 해방을 맞은 기쁨과 감격은 사라지고 통일된 조국은 볼 수 없이 민족의 불행과 참극이 태동(胎動)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집은 그때 어떠했는가. 심한 가난에 시달리며 근근이 연명을 하니 큰떨 鍾郇은 당초에 초학에 걸려 금계랍만 사다 먹여 니았다가는 걸리고 또 나았다가는 또 걸리고 수십 차례를 반복하는 바람에 얼굴에 노란 꽃이 피고 천품이 약질 인데다가 볼 수 없이 야위었다.  식구 전원이 영양실조로 빌빌 하던중 어머님은 전 해(1949년)에 돌아 가셨다. 착하신 어머니께서는 시시때때로 아버지의 잔소리에 마음 밝을 날이 없으셨다. 그렇지만 언제나 온화(溫和)한 얼굴이신 어머니시었다. 5년 동안 좋은 음식도 못 잡수시고 돌아가신 생각을 하니 가슴이 저리고 뼈가 아프다. 항시 불건(不健)하든 내자(內子)는 이해에 들어 노상 병석에 누워있었다.  동란(動亂)이 일어나자 피난민 (避難民)이 남하 하기 시작했다. 1950년 7월 16일 이다. (음6월2일)조반후 학교로 놀러 갔더니 얼마 안돼 애들이 부르러 왔기에 급히 돌아 와 보니 가족들이 둘러 앉아 애도(哀悼)의 눈물을 짓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두 눈에서 두줄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병처 (病妻)는 감았던 눈을 다시 뜨더니 나를 보고 ‘왜울어 왜울어 ~나 안죽어’ 하다가 그대로 영 영 눈을 감고 말았다. 한참 살 나이인 46세, 나를 따라다니느라고 고생도 많이 했지만 온순하고 무언 정숙한 그녀였다. 
4남3녀를 낳았지만 맏이로 鍾元이 아래로 鍾來. 弘이를 잃고 중간 4남매를 두어 맏며느리까지 보기는 했지만 한스러운 죽음이었다.

수일전 부터 금강유역(錦江流域)에서 4키로 이상 거리로 피난 하라고 관명(官命)을 외치는 이장의 방송이 들렸다. 그러나 중병으로 신음하는 병처와 연로하신 아버지와 그리고 과년한 두 딸을 데리고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런중에 내자(內子)가 운명을 했는데 조객(弔客)도 회장(會葬)꾼도 없어 할 수 없이 장사를 그날 마침 대전서 피난온 사촌들과 가족끼리 지냈으나 그래도 피난길을 떠날 수는 없어 그대로 견디어보기로 했다.  한나절이 좀 지나니 청주서 매제(妹弟) 이규첱(李圭哲)네 식구와 사촌매제 박성호(朴成鎬)네 가족 처질(妻姪)등이 마당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소, 개 까지 끌고 왔으니 근40여명의 대가족(家族)이 되였다. 먹는 것은 농사지은 것을 먹지만 잠잘 방이 없다. 기히 들어있는 학교교실의 피난민을 딴 교실로 옮기게 하고 한 칸을 차지하여 여자들은 집에 남자들은 학교에 두 패로 갈라서 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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