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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모님 이야기 [130호][옛날이야기]
2008-08-25 10:48:54

나의 고모님 이야기

전번에 이야기 한 것 같이 아버지는 남매 뿐이셨다. 고모님은 할머니를 닮아서 키는 작으셨으나 마음이 아주 착하시였다. 우리아버지가 충북 옥천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을 때 고모님은 우리 아버지를 따라 옥천에 살면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한다. 그때는 나이가 많아서 학교 다니는 것이 보통이였고 우리 아버지보다 나이가 더 많은 학생도 많았다고 하니 고모도 아마 과년한 나이에 학교를 다녔다고 본다. 우리 고모부 되시는 분이 같이 옥천학교에 근무 하고 계셨는데 우리 아버지에게 매일같이 누이동생을 달라고 졸라서 견디다 못해 할아버지에게 상의를 하시고 두 분의 결혼을 허락 하셨다 한다.

결혼해서 3남2녀를 두셨고 고모부는 절대적인 가부장인 분이셨는데 60대에 위암으로 작고 하셨으며 고모님은 그 후 교회에 열심히 다니시고 93살까지 행복하게 사시다가 우리 할머니같이 편안하게 소천 하셨다. 평생 긍정적인 삶과 소식에 조미료 없는 반찬만을 잡수셨으니 무병장수 하신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만주로 이주하여 갔을 때에도 고모부는 계속 충북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으며 해방 후도 우리아버지는 귀국하여 두메산골에서 농사일을 하시면서 두문불출 할 때도 고모부는 정년까지 교육계에 근무하시다가 퇴직하셨다. 나는 그 무렵 나의 황금시기에 아버지덕분에 시골서 농사일을 거들고 허송세월을 낚고 있을 때 고종사촌형은 서울의대를 졸업하여 의학박사가 되셨고 둘째는 서울공대를 졸업하고 고대 교수가 되었다.

큰 고종사촌형은 나보다 두 살 위다. 6.25때 우리 집에 피난 와서 고생을 같이 했었고 수복후 복학을 하였더니 소위계급장을 달아주고 군위관에 임명시켜 논산훈련소로 일선으로 오랫동안 복무하다 퇴임한 후 내가 서울 신당동에 살 때 우리 집 길 건너에 병원을 차렸다. 신출내기였고 기반도 없었을 때니 손님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나는 퇴근 후 병원으로 찾아가서 형님과 둘이서 소주를 같이 마시며 무료를 달래곤 하였다. 그 후 인천 도립병원 외과과장을 엮임 하다가 인천에 이종찬외과병원을 개업하여 이름을 날렸다. 지금은 나이가 많아 병원을 세주고 아들이 개업하고 있는 강남의 정형외과병원에 찬조출근을 하고 계시며 올해 81살이시고 장로님으로 여생을 여유 있게 보내시고 계신다. 

둘째 고종사촌 종남이는 나보다 한살 아래다. 내가 아직 서울로 오기 전 시골서 농사일을 하며 달걀을 나무상자에 넣어 호롱불로 부화시키는 일을 시험 하던 때이다.

종남이가 서울대학 시험에 떨어지고 대전대학에 입학하였다. 그 대전대학을 내가 살고 있는 방아실서 통학을 했다. 그때는 모두 가난했기에 아마 대전에 하숙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방아실서 대전까지는 버스도 없었으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서너 시간을 걸어서 학교를 다닌 그 끈기 참으로 대단하였다. 그때 우리 집사람이 아무 불평 없이 뒷바라지를 해주었음을 지금까지 나는 집사람에게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다음해 서울대학교 공대를 당당히 합격하여 서울로 갔다.

그 후 내가 서울로 올라가 대학을 다닐 때 처음 서울역 건너에 사시던 당숙모 댁에서 하숙을 하였다가 다시 동자동의 대학 동창생내 집에 하숙을 옮겼을 때인데 해방촌에 있는 권씨(종남이의 고종)가 같은 값이면 자기내 집에서 종남이 하고 같이 하숙을 하면 어떻겠냐고 제의를 해 와 권씨 집으로 하숙을 옮겨 종남이와 같이 지냈다.

권씨는 트럭 사업을 하고 있었으며 남대문에 있는 문리대에 다니고 있는 동생 한 분이 있어 셋이서 한방을 쓰며 학교를 다녔다. 그 후 나는 취직이 되어 신당동으로 하숙집을 옮겼고 종남이도 서울대학교에 가까운 답십리로 하숙을 옮겼다.

종남이는 서울 공대를 졸업하고 대전에 있는 대전이연(자동차 베어링을 생산하는 공장) 에 취직을 하였다. 

1967년 내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혼자 독립하여 을지로 3가에 사무실을 내고 있을 때 종남이가 나의 사무실 길 건너에 대전이연의 베어링 판매소를 냈다.

그때만 해도 품질이 아무리 좋아도 국산이라면 외면할 때였으니 대전이연의 베어링은 품질 면에서 일제에 뒤떨어지지 않았지만 역시 외제를 선호하던 때라 판매량을 올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 후 이 일도 마음에 안 들었던지 공업연구소에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언제던가 고려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하였다.

그 무렵 종남이가 답십리에 집 하나를 살려고 계약을 했었다. 그러나 그때는 종남이나 나나 별로 돈이 없던 시절 이였으니 중도금을 줄 수가 없어서 계약금을 떼일 처지가 되여 나한테 찾아와 그 집을 나보고 인수 해달라고 상의하러 왔었다. 나도 별로 저축한 것이 없었으나 같이 가보기로 했다.  청량리 역 못 미쳐 우회전을 하여 한참 들어가니 답십리가 나왔다. 주위는 온통 채소밭과 과수원이 있었으며 비포장도로에 전기도 밤에만 들어오고 수도도 없었다. 새로 지은 깨끗한 한옥 이였기에 내가 인수키 로하고 중도금을 지불해주었다. 그 후 일 년을 더 신당동에 살다가 수도가 들어온다는 소식이 있어 답십리로 이사를 갔다. 종남이 덕에 생전 처음 내 집 마련이 이루어진 셈이다.

종남이는 그 후 고대교수로 활약하다가 간암으로 죽었다. 낚시를 좋아 하였고 항상 반주로 술을 마신다고 자랑 했었다. 그 술이 원인이었을까?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뜻이니 어쩌겠는가. 슬하에 4형제를 두었다. 큰애가 나의 막내인 승호와 동갑이며 줄줄이 머슴아만 낳았다. 어찌나 개구쟁이들이었던지 언젠가 종남이네 집에 갔더니 방안에 있는 농이며 전축 손잡이가 하나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할 수 없이 천장에 매달았더니 의자를 갖다 놓고 협력하여 끌어 내렸다 한다.

어느 해 봄 그 집 식구하고 함께 창경원으로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우리 집 승호는 막내였으므로 항상 우리는 승호를 잃을까 손목을 꼭 잡고 다녔으나 종남이네 맏이(양우)는 승호와 동갑인데도 동생 셋을 길건 는 것을 끝까지 참견하였고 창경원 안에서도 동생들을 돌보는 라 자기 자신은 구경도 제대로 하질 않았다. 역시 장남을 다른가보다.

종남이는 죽기 전에 고대 입구 안암동에 아주 큰집을 사서 이사를 갔다. 병세가 악화되어 인천 형님(종찬)병원에 입원했으나 임종 직전 인천서 안암동 집으로 옮길 때 나도 같이 차를 탔다. 택시 안에서 줄 곳 "주여 주여"하고 소리 내어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평소에 종남이와 나는 항상 기독교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종찬형님 내외분은 장로와 권사로 교회에 다니고 있었음으로 우리 둘은 항상 형님 내외분에게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서슴치 않았는데 형님내외분의 간곡한 전도가 있었다고 본다.

임종이 가까우니까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 왔나보다. 그리고 며칠 후 저 세상으로 갔다. 그때 나이 50대 후반 이었다. 아까운 나이었고 한창 일할 때이었는데……. 갖은 고생을 다하며 공부하여 이제 이름을 날릴 때가 되였는데 ……. 아까운 인재가 먼저 가 버렸다.

종남이는 슬하의 사형제가 모두 공부들을 잘하여 지금은 의사와 변호사로 성공하여 잘 살고 있다. 참으로 나하고는 고생도 같이 했었고 제일 가까이 지냈는데…….

셋째 종관이는 교편생활을 하다가 정년퇴직을 하였고 딸 둘도 시집가서 잘 살고 있다. 그리고 고모님은 슬하에 손자손녀가 21명이나 된다.  자손들이 다 다복하게 잘 살고 있는 것은 고모님이 평생을 후덕하게 사신덕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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